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리 가가린 (문단 편집) == 일생 == [[소련]] [[스몰렌스크]] 주 그자츠크[* 동쪽으로 [[모스크바]], 서쪽으로는 [[벨라루스]] 공화국과 인접해 있다. 지금은 그의 이름을 따서 가가린 시로 개칭되었다.] 근처의 시골 마을 클루시노에서 출생했으며 아버지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가가린은 목수, 어머니 안나 티모페예브나 가가리나는 목장 노동자로 소 젖을 짜는 일을 했고, 당시 소련 사회의 순수한 노동자 계급 출신이었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당시 그와 그의 가족은 나치 독일군 치하의 소련에서 살았고 [[독소전쟁]]시기 가가린은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비행조종사의 꿈을 가지게 된 건 [[독소전쟁]]이 소련의 승리로 끝난 이후 다시 학교를 다니던 유년시절이었다. 보수적인 아버지는 학비가 들까 봐 가가린이 도시로 나가서 학교를 가는 것을 그다지 원치 않았으나, 가가린은 "학교는 공짜예요!"[* 당시 소련에서는 초등 교육까지는 무료였다. 대학 교육 과정을 무상으로 전환한 것은 1955년부터였다. 1930년대부터는 중등 및 고등전문교육기관과 같은 노동자ㆍ농민 전문학교나 군사학교 등을 점차 무상화하게 됐다. 지식인을 양성하는 대학의 경우 1940년 기준으로 1년 학비가 150~300루블이었는데, 당시 노동자 평균 임금이 300~400루블인 점과 의료 및 주거가 무상인 점 세금이 낮은 점을 감안하면 비교적 저렴했다. 참고로 1955년 기준 소련 노동자 평균 임금은 525루블이며, 학비가 계속 인하된 점을 고려하면 결코 비싸지 않았다. 물론 모든 것이 파괴되던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대학교육까지 무상화하려던 노력은 잠시 연기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쟁 이후 전후 재건기에 점진적으로 대학 학비를 인하했다. 그렇게해서 1955년이 돼서야 대학교육도 전면적으로 무상화 됐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할 점은 그 초등교육의 무상화도 스탈린의 5개년 계획이 실행되고 나서야 자리 잡았다는 점과 이런 것을 시도한 나라가 당시로서는 소련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https://tabrik.ru/en/platnoe-obrazovanie-pri-staline-dokazano-platnoe-i-besplatnoe-obrazovanie/|#]] ]라고 말해서 허락을 받아냈고, 이후 가가린은 모스크바 근교의 기술 학교(테흐니쿰)에서 금속 제련 관련 교육 과정을 이수하였다. 그 뒤 공부를 계속하여 기술 학위를 얻고자 사라토브 산업 학교를 다니며 동시에 인근 항공연구소에서 비행기 조종을 배웠다. 이때 가가린은 자금 사정이 여유롭지 않아 볼가 강의 항만 근로자로 일했었는데 그럼에도 가가린은 자신의 돈이 생기면 부모님을 위한 선물을 사는데 돈을 다 써버렸다고 한다. 그 뒤 [[오렌부르크]]에 있는 공군사관학교에 1955년 입학하였는데 이때 가가린은 2인용 훈련기 착륙에 서툴렀다고 한다. 이 때문에 퇴교 위기에도 처했었는데 다행히도 연대장은 가가린에게 기회를 한번 더 주기로 했고 그의 교관은 가가린의 좌석에 쿠션을 깔아주어서 그의 시야가 확보될 수 있도록 도왔다[* 그가 157cm의 단신이 었기 때문에 시야각이 확보가 안됐을 것이다.] 당연히 그는 성공적으로 착륙 했고 그는 1957년부터 홀로 임무를 수행 할 수 있게 된다. 가가린은 166시간 47분의 조종 시간을 쌓았으며 이에 1957년 졸업하여 공군에 중위로 임관 루오스타리 항공기지에 배치받는다. 이때 오렌부르크 간호학교 출신의 아내 발렌티나를 모스크바에서의 5월 1일 노동절 행사에서 만났다고 한다. 둘은 11월 7일 결혼을 했다. 가가린이 아내와 교제하게된 계기는 그녀가 유일하게 그를 튕긴 여자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가가린의 친구 또한 그녀에게 호감을 느꼈다고 하는데 그녀를 가가린에게서 떨어지게 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1959년 가가린은 비행시간 256시간을 달성했고 상위로 진급함과 더불어 3급 비행사가 된다. 이때 루나3호가 발사됐는데 가가린은 여기에 관심이 많았고 바부슈킨 중령의 지원으로 더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1960년 다른 19명과 함께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요구 조건에 의하여 [[보스토크 계획]]을 위한 소련의 우주인 선발 프로그램을 거쳐 '''인류 최초의 우주인이 되었다.'''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를 선발하는 작업이라서 소련 체제 특성상 정치적 고려가 들어가는것은 당연했다.[* 이는 미국도 마찬가지라서, 닐 암스트롱을 달에 처음 발을 디딘 사람을 뽑은 이유중 하나가 과시욕이 없다는 것이었다.] 심사 당시 알렉세이 레오노프, 게르만 티토프, 유리 가가린 등의 후보가 올랐는데[* 가가린 뿐만 아니라 레오노프와 티토프도 모두 소장, 대장으로 승진했다.], 다행히 가가린은 기량 및 능력도 출중했고, 출신성분조차 평민 출신 노동자 집안이라 평등한 사회를 약속하는 사회주의 체제의 우수성을 홍보하기엔 안성맞춤이라 만장일치로 선발되었다고 한다. 즉 다른 후보자들도 기량이 뛰어났지만 출신성분이 부자 가문이거나 반동, 불순 가문에 해당되면 얄짤없이 탈락됐다. 그래도 첫 발사 이후 티토프는 가가린의 뒤를 이은 두번째 우주비행사가 되었으며 레오노프가 인류 최초의 우주 유영 타이틀을 가지고 있고 다른 후보자 일부도 이후에 우주여행을 했기에 소련의 첫 유인 발사의 상징적인 이미지가 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